
김미재

editor's note
서울에서 ‘취향’이란 말은 너무 쉽게 닳는다. 예쁘다는 감탄은 넘치고, 새로운 공간은 매주 생겨나며, 브랜드는 계절처럼 바뀐다. 그런데 그 소란 속에서도 오래 남는 장면이 있다. 한 번 보고 나면 잊히지 않는 테이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전염되는 리듬, 그리고 “이건 왜 이렇게까지 완벽하지?”라는 질문을 남기는 디테일. 그 장면의 뒤에는 종종 김미재가 있다. 도쿄에서 잡지를 오려 스크랩하던 소녀는 런던에서 프린트와 실크스크린을 배웠고, 서울에 돌아와 ‘해외의 아름다움’을 흉내 내는 대신 서울의 취향을 서울의 언어로 번역하는 법을 익혔다. 그에게 취향은 이미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설계다. 그리고 그 설계는 결국 사람을 모으고, 브랜드를 오래 살게 하는 구조가 된다.
김미재의 존재감은 단지 ‘잘 만든 결과물’에서 오지 않는다. 그는 협업의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다. 서울에 가면 그를 만나야 한다”는 소개가 네트워크가 되는 순간들. 라일라 고하, 아틀리에 셉템버, 아파르타멘토까지 이어지는 연결은 우연이 아니라, 한 번의 진심 어린 몰입과 기준 높은 완성도가 쌓아 올린 신뢰의 결과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가장 궁금해해야 할 인물이 김미재인 이유는 명확하다. 트렌드가 아니라 ‘결’이 브랜드의 생사를 가르는 시대, 그는 유행을 소비하지 않고 자기다움을 지속 가능한 장면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미재는 다음에, 서울의 무엇을 바꿔놓을까.
1. 도쿄와 런던 사이에서 피어난 취향


— 대표님께서는 유년시절 도쿄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셨죠. 일본으로 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중학생이 될 무렵, 가족 전체가 일본 도쿄로 이민을 갔어요. 아버지 일로 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이주했고, 이후 어머니와 남동생, 저는 일본에 계속 남아 학업을 이어갔어요. 엄마가 일본 생활을 좋아하시기도 했고, 이모가 일본인 이모부랑 결혼을 해서 도쿄에 계셨던 덕분에 자연스럽게 일본 생활에 스며들었던 것 같아요.
— 도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던 문화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일본에 있을 때 잡지를 정말 많이 봤어요. 일본의 호황기 속에서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아이폰이 발달했던 때는 아니라 잡지의 종류가 정말 많았어요. 그중에서도 <피가로Figaro>라는 잡지를 가장 좋아했었고요. 파리나 런던의 외국 언니들 집이 많이 소개됐어서 예쁜 집 사진이 보이면 페이지를 잘라서 스크랩하는 게 소소한 취미였어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롯폰기에 츠타야가 처음 생겼었거든요. 서점 안에 스타벅스가 있어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책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땐 정말 천국 같았어요.(웃음) 주말이면 로프트, 파르코, 타워레코드를 순례하듯 돌아다녔는데 이 시기에 패션이나 문화적인 부분에서 여러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예쁜 것들 보러 다니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좋아하고요.
프랑스 매거진 <Figaro>는 그녀의 감각을 결정지은 중요한 매체였다.
파리와 런던의 집, 공간, 생활 방식을 다룬 지면을 스크랩하며, 김미재 대표는 ‘공간을 읽는 눈’을 키웠다.
“고등학생이 보기엔 조금 이른 잡지였는데,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그녀의 감각은 이미 그때부터 ‘생활을 하나의 장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라고 있었다.

— 도쿄에서 런던으로 넘어가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고등학생 때 원래는 유니세프에 가고 싶어서 미국 유학을 준비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학교 행사 포스터를 직접 만들 기회가 있었는데, 대단한 작업도 아니었거든요. 도형을 몇 개 넣고 색을 고르는 간단한 작업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밤을 새웠던 날이었어요. 그때 처음 디자인이라는 영역에 흥미가 생겨 바로 영국 유학을 준비했어요.
실기를 중요시하는 일본 미대에 가려면 미술 학원을 2~3년 이상은 다녔어야 했을 텐데, 영국 미대는 조금 달라서 데생 미술 시험보다는 스케치랑 아이디어 중심이었어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어요. 입시 기간에 바짝 집중해 콜라주랑 스케치 작업 위주로 준비했고, 영국은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4월에 면접을 보고 입학 전까지 시부야에 있는 프레쉬니스 버거Freshness Burger나 무지Muji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영국에 넘어가서도 무지 아르바이트를 4년 넘게 했었어요.

— 지금 대표님의 미감에는 ‘취향’이라기보다 하나의 시간과 환경이 축적된 듯한 결이 느껴집니다. 어린 시절의 공간, 집의 분위기, 부모님의 생활 태도나 취향 가운데, 지금의 감도를 만들었다고 느끼는 기억이나 장면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초등학생 때 친구들한테 집에서 가장 예쁜 물건 하나씩 가져오라고 한 다음, 아파트 지하에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낡은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친구들에게 받은 예쁜 물건들을 그곳에 진열해 놓았었거든요. 나중에는 어른들한테 결국 들켰는데 보기에 마치 제사상, 재단처럼 희한한 모습이었대요.(웃음) 저희 어머니는 진지하게 “왜 이렇게 했냐고” 물으셨던 기억이 있어요. 이미 이때부터 예쁜 것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 역시 옷을 좋아하셨고, 어린 나이에 결혼하셔서 환경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여건이 달랐다면 패션이나 디자인, 혹은 요식업과 같은 일을 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 도쿄에서의 시간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공부하게 되셨잖아요. 도시와 문화, 교육 환경이 바뀌는 그 전환의 시기는 대표님의 시선과 작업 태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유학생들이 처음 영국 미대에 입학하면 첫 1년은 파운데이션 코스Foundation Course가 진행돼요. 영국인들은 고등 수업 때 이미 다 배우는 내용들을 유학생들이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제도인데 패션, 그래픽, 텍스타일 등 디자인 모든 영역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코스였어요. 저는 영국으로 갈 때만 해도 그래픽 디자인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영국 유학을 갔는데, 막상 파운데이션 코스를 밟고 나니 텍스타일 디자인의 매력에 빠져버렸죠.
그래픽은 디스플레이나 인쇄물을 통해서만 표현이 가능한 영역이라면 텍스타일은 직조, 스티치 등 따뜻하게 표현할 방법이 있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무엇보다 영국은 텍스타일 디자인이 유독 더 도드라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도시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어요. 그 외에도 학교 공부를 하면서 계속 갤러리, 편집숍, 빈티지 숍 등등 예쁜 공간을 찾아다녔어요. 학교 선생님도 ‘미재, 요즘 어디가 핫해?’라고 물어보실 정도였으니까요.
직조, 니트, 자수, 패브릭 프린트. 손을 통해 만들어지는 감각적 물성은
그녀가 추구하던 ‘공간적 미감’에 더 가까웠다.
패션보다는 인테리어에 가까운 감각. “저는 옷보다 공간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이때부터 그녀의 디자인은 ‘몸 위의 패션’이 아니라 ‘사람이 머무는 장면’을 향하기 시작한다.

— 도쿄와 런던에서 보낸 오랜 시간은, 지금의 대표님에게 어떤 시선과 태도를 남겨주었나요? 그 시간들이 지금의 작업과 삶의 방식에 스며든 순간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도쿄가 디자인과 문화생활 전반에서의 ‘자극의 도시’였다면, 런던은 ‘흡수의 도시’였어요.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안 입어본 장르가 없을 정도로 정말 다양한 옷도 입어보고요. 음악, 영화, 책 모두 제 안으로 흡수시킨 시기였던 것 같아요.
또 도쿄와 런던 생활에서 공통으로 영향받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가장 대표적인 건 ‘장인 정신’인 것 같아요. 두 도시 모두 오래된 숍들이 많기로 유명하잖아요. 30여 년 전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가던 가게들은 지금 다시 가도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만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서울은 이야기가 조금 달라요. 페이퍼가든으로 서울에서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가로수길 풍경과 지금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잖아요. 지난 20년 동안 서울에서 클라이언트들과 함께 만든 브랜드도 보면 살아남은 브랜드가 3분의 1 정도 되려나요. 이 지점이 제가 몇 년 전부터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해요. 단순히 유행에 편승하고, 얕은 취향을 베이스로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의 취향에 대해 오래 고민하고,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만드는 브랜드가 조금 더 오래 살아남게 하기 위함이 큰 것 같아요.
2. 서울, 그리고 아트 디렉터 김미재

— 휴학 중 잠시 머물렀던 서울에서 ‘페이퍼가든’ 대표님을 만나 첫 브랜드 작업을 맡게 됐어요. 자신의 커리어에서 하나의 출발점이자 중요한 전환점이었을 것 같아요.
영국 유학 도중에 향수병이 오더라고요. 제 또래 친구들은 서울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무작정 휴학하고 서울로 왔죠. 그때 마침 잡지 <엘르ELLE>에서 압구정 로데오의 편집숍 공간이 핫하다길래 무작정 구경하러 갔었어요. 입구에 ‘직원 구함’이 붙어 있길래 바로 지원했었는데, 이력서를 보신 대표님이 매장 스태프 말고, 나랑 같이 카페 하나 준비하자고 하셨는데 그게 많은 분이 아시는 ‘페이퍼 가든’이었어요. 다음날 바로 출근 했고 “아직은 서울에 예쁜 카페가 많지는 않아” 하시면서 가로수길이나 홍대에 있는 카페들에 저를 데리고 돌아다니시면서 가본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물어보고는 하셨어요.
그때는 인터넷이 엄청나게 발달한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잡지 많이 보고, 스크랩하고, 외국 예쁜 카페 찾아서 프린트해서 장르별, 도시별로 모으고 또 무드보드 만들어서 대표님 보여드린 다음 마음에 들어 하시면 인테리어팀에 전달해 원하는 이미지를 어필하는 등의 일을 했어요. 또 카페에 함께 할 키친 셰프, 매니저를 채용하는 과정에도 함께 했는데 그들에게는 우리 카페에서는 어떤 메뉴를 소개하면 좋겠는지, 각 메뉴는 어떤 접시에 나가면 좋을지, 토스트 두께는 어느 정도면 좋겠는지, 크림은 그런 느낌 아니고 이런 느낌이 좋겠다고 등 디렉터의 일을 조금씩 시작하게 된 시기였죠.
영국 유학 도중 찾아온 향수병은 그를 다시 서울로 데려왔다.
인터넷보다 잡지와 스크랩이 먼저였던 시절,
김미재 대표는 해외의 아름다운 카페들을 모으고, 도시별 무드보드를 만들며 공간의 취향을 번역했다.
메뉴의 접시와 토스트의 두께, 크림의 질감까지.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들을 조율하며, 사람과 공간이 어울리는 방식을 몸으로 익혔다.
그 시절은, 감각을 구조로 바꾸는 법을 처음 배운 시간이었다.
3. ‘아트먼트뎁’이라는 이름으로

— 사장님과의 인연으로 ‘페이퍼가든’과 ‘르 알래스카’를 거쳐 다양한 작업을 이어오신 뒤, ‘아트먼트뎁Artment.dep’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브랜딩을 시작하게 되셨잖아요. 나만의 회사를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까요?
그 당시 제 성격을 생각해보면 사업가의 성향은 아니었어요. 다만 일에 대한 욕심만큼은 꽤 있는 편이죠.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회사를 갖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페이퍼가든’과 ‘르 알래스카’ 두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 서울에서 제 이름이 조금 알려지기 시작했고, 비슷한 성격의 작업이 계속 들어왔어요. 점점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지더라고요. 이 생활을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그때 처음으로 고민하게 됐죠.
파트너에게 견적서는 어떻게 줘야 하고, 또 계약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을 이어가던 시기였어요. 지금에 와서는, 학교를 졸업한 뒤 한 번쯤은 회사에 소속된 삶을 경험해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아요. 그만큼의 빈칸과 노하우를, 결국은 스스로 부딪히며 배워야 했으니까요.

— 바쁜 일정 속에서도 아트 디렉션 수업을 시작하게 되신 것도, 지금까지의 경험과 고민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선택이라고 봐도 될까요?
맞아요. 처음 회사라는 테두리를 만들 때가 25살이었거든요. 그때의 나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들에게 가이드가 되어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과거의 나를 돕는 기분으로요. 누군가 알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것들을 꾹꾹 눌러 담아서 커리큘럼을 짜고 있죠. 그래서인지 저는 누가 20대 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단번에 싫다고 답해요. 저는 20대가 제일 힘들었거든요.
아트먼트뎁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을 계속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식에서 출발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게 늘어난 프로젝트들 앞에서,
‘회사’라는 형식은 생존을 위한 구조이자 동시에 배움의 과정이었다.
— ‘아트먼트뎁’이라는 이름에는, 대표님이 그리고 있는 작업의 태도와 세계관이 어떻게 담겨 있나요?
디파트먼트Department 라는 단어를 보면 ‘백화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부서’라는 뜻도 있잖아요. 여러 영역의 일을 넘나들며 작업하고 싶은 제 바람을 담고 싶었어요. 여기에 제가 가장 가까이 두고 있는 ‘아트Art‘를 더해, 아트먼트뎁Artment.dep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죠.


— 대표님의 아트 디렉션 수업을 들었다는 분들을 주변에서 종종 만났는데요. 수업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셨고, 주로 어떤 내용들을 나누고 계신가요?
수업을 처음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압구정동에 있던 오피스에서였어요. 지금처럼 고정적으로 운영하게 된 건 4~5년 전쯤이고요. 영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수업 코스가 굉장히 많아요. 드로잉은 20파운드, 콜라주는 50파운드처럼,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시야와 견문을 넓힐 기회가 많은 도시였죠. 또 게스트 세션을 통해 특정 인물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듣고, 이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어떻게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눌 수 있는 자리들도 인상 깊었어요.
그런 경험의 영향 덕분인지, 저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클래스를 열게 됐어요. 정기 클래스 3회차 코스에는 실력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아트 디렉터들을 초대해 게스트 세션을 진행하고 있고요. 수강생이 많지 않았다면 중간에 그만뒀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많은 분이 찾아주세요. 수업 과제에 대한 개인 피드백에만 한 사람당 3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바쁜 프로젝트가 겹칠 때는 정말 쉽지 않은 일정이죠.

— 반대로, 이 수업을 통해 대표님이 얻게 되는 것도 분명 있을 것 같아요. 클래스를 운영하며 대표님 스스로가 느끼는 변화나 얻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 진행할 때는 제 에너지를 조금 더 쓰는 느낌이고요. 수업할 때는 제가 에너지를 받는 듯해요. 클라이언트와 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비즈니스 측면이라면, 클래스는 ‘의미 있는 일’로 다가오거든요. ‘지난 세월 동안 고군분투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네. 의미 없었던 일은 아니었네’ 하면서요. 분명 지난날에는 성공도 있었지만, 실패도 있었으니까요. 그 실패를 경험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제가 위로받기도 하고요. 그밖에는 제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오시니까 개인 브랜드에 대한 관심과 니즈가 꾸준히 있구나 몸소 느껴지더라고요. 클래스를 들으러 오셨다가 지금 저희 직원이 된 분들도 3~4명 정도 되고요.(웃음)


— ‘페이퍼가든’과 ‘르 알래스카’를 만들던 시절의 대표님과, 지금의 대표님 사이에는 시선이나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그때의 저는 정말 나이브 했고, 일하는 방법도 잘 몰랐어요. 조직 문화에 대해서도 거의 문외한에 가까웠죠. 초기에 대기업이랑 계약을 하면 많이 휘둘리고, 혼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도 있었어요.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아, 이제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휘둘리면, 그 부담이 결국 직원들에게 돌아간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어요.
초반에는 직원도 저와 비슷한 사람들만 뽑았어요. 제 감각과 능력치에 가까운 인물들이면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야, 그렇게만 팀을 꾸리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티 컬렉티브’를 운영하면서 조금씩 기준이 잡히기 시작했고, 그때부터는 직원들과 클라이언트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됐죠. (웃음) 이제는 제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위치가 됐지만, 그만큼 책임도 훨씬 커졌어요. 예전처럼 연락을 늦추거나, 하루쯤 미루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죠.